함께 크는 교육

대안교육 식민화를 넘어서기 위하여 - 고병헌

★반짝반짝 2013. 1. 25. 10:20

대안교육 식민화를 넘어서기 위하여 - 고병헌

2008/05/01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대안교육, 대안학교에 관심이 있다. 사실 역사적으로 교육을 개혁하겠다는 다양한 시도들 부단히 전개되어 왔지만 대안교육운동처럼 이른바 교육영역에서의 관(官)과 재야(在野) 모두가 ‘긍정적인 관심’을 보인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이와 함께 한국 대안교육운동의 또하나 특징은 오랜 대안교육 실천 역사를 지닌 외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매우 짧은 시기에 엄청난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는 사실이다. 대안교육운동의 핵심적인 특징은 바로 대안교육운동이 가치 지향적이라는 점이며, 바로 이것이 대안교육운동을 기존의 다양한 교육개혁운동과 확연히 구별짓는 요소이다.

우리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참으로 전례없는 위기에 봉착해 있다. 현재 위기의 극복은 제도와 구조의 개선을 넘어 가치관의 변혁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의 대안교육운동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성실히 부응하려는 과정에서 운동의 발전과 사회적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진보적 교육운동과 차별성을 갖는다. 그러면,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대안적 가치’의 본질은 무엇인가?


세계화된 국가, 세계화된 위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0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세계질서’는 정의롭고 평화가 충만한 세계 공동체적 질서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서구중심의, 보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중심의 힘의 질서로 전세계가 재편되고 있음을(오재식, 『새 세계 질서와 인권』, 3쪽) 목격한다. 세계적으로 축적된 거대자본의 전세계적 자기운동은 필연적으로 국민경제의 파편화와 파괴를 낳게 되는데(미셸 초스도프스키, 『빈곤의 세계화』, 16쪽), 현재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IMF 시대’ 이전에도 우리 사회의 ‘복지 수준’은 정말로 형편없었다. 또한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냉전체제가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을 간섭하였고 냉전의 상징인 국가보안법이나 보안관찰법, 전향제도 등이 지금도 엄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세계화된 위기’는 우리들의 삶의 질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훨씬 더 대응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의 범세계화와 정보화, 국민 국가의 규제력 약화라는 오늘의 현실에서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라는 문제는 이제 국가가 해결할 수 없는 범위로 확대”(‘인권과 평화단체 네트워킹 워크숍’ 자료집 2쪽)되고 있기 때문에 노동탄압이나 부당노동행위, 성차별과 같은 ‘오래된’ 인권문제들도 ‘세계화된 자본’의 힘 앞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다양하고 심각한 형태로 우리의 삶을 간섭하고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이 모든 가능성이 빠르게 현실화하는 것을 우리는 '구제금융’이라는 이유 때문에, 또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무기력하게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조정’의 힘이 가장 크게 미치는 영역 중의 하나가 바로 교육인 것이다. ‘IMF 시대’에 교육 영역이 받게 되는 ‘구조조정’ 압력은 경제나 사회의 다른 여타 부문의 ‘구조조정’과 같은 시기, 혹은 한 박자 늦게 행사될 수 있지만, 그 체감 강도는 우리처럼 사회복지 수준이 현저히 낮은 국가에서는 ‘기업의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의 전도’현상이 훨씬 극적으로 발생하게 될 것이므로 어느 경우보다도 심각할가 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국제통화기금’에 소위 ‘구제’를 요청한 이후 우리나라 국가예산 중에서 가장 먼저 큰 폭으로 ‘조정’된 영역이 ‘교육’이었다는 사실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군축과 같이 예산 지출 우선 순위에서의 근본적인 변혁 없이 지금처럼 교육지출이 우선적으로 감소의 대상이 되고, 아울러 국가적 차원에서의 대안적인 경제체제,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창출하고 확산하려는 노력이 없는 한 세계 금융자본의 우리 교육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팽창할 것이다. 교육을 둘러싼 이러한 국내외 정세의 변화를 고려할 때 현재 우리 사회에서 힘을 얻어가고 있는 대안교육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우리가 좀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대안교육의 식민화’이며,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현실화 할 가능성이 있다.


신자유주의와 식민화의 첫번째 근거


신자유주의가 입장이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동시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의 원칙에 따라 ‘교육을 시장에 맡긴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교육의 민주화를 위해 ‘표준’을 없애자는 주장에 대항하여 교육의 ‘수월성’(academic excellence)을 지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도로 비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제적인 현실에 근거한 교육 소비자의 선택과 통제를 통하여 소위 부적절한 교육 내용이나 기관을 없앨 수 있는 호기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서 주의할 점은 한 가지 ‘정치적 기제’를 통하여 서로 상충하는 기대가 동시에 만족될 수는 없다는(Ruth, 55쪽) 사실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교육은 어떤 모습을 띨 것인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야 문제가 예견되면 대책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자유주의의 성격은 무엇이며,‘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진 교육은 어떤 모습일 것인가? 김기수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성격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독립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신보수주의’라는 것과 결합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반독립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 (영국 대처 정부가 들어선 후) 실시한 정책은 국가의 시장개입을 삼가고, 주요 국영기업이나 국영프로그램을 민영화하고, 정부기구를 대대적으로 축소함으로써 국가재정의 지출을 줄이면서 한편으로는 세금을 ― 특히 자본들이 부담하던 세금을 ― 낮춘다는 것이었다. 국가개입으로부터 시장을 풀어주고 되도록 시민사회 내의 문제들이 시장 자체의 자연적인 움직임에 따라 해결을 보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고전적 자유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가르켜 ‘신자유주의’라 한다.”(김기수, 166∼167쪽)신자유주의는 한 마디로 “호혜평등의 이념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시장의 힘에 의한 완전경쟁의 논리이다. (그래서) 미국이 동남아시아 나이키 신발공장의 아동 노동을 비난하는 것도 아동 노동에 대한 보호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덤핑’을 공격하기 위해서”(김동춘, 『IMF 체제하의 한국』, 306쪽)이다. IMF 체제하의 우리 사회는 이러한 신자유주의를 교육을 포함한 거의 모든 사회부문의 정책기초로 삼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이론과는 달리 “완전한 탈규제, 시장에 의한 최적의 자원배분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더러,자본의 운동이 우선 불안정하고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에 … 강요된 세계화에 의해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 작업이 본격화될 경우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엄청난 불평등이 발생할”(김동춘,『IMF 체제하의 한』, 307∼312쪽)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기초하여 우리의 교육정책이 결정되고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혁해야 할 복지국가도 아니고 교육과정에서 등록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여전히 국가통제하에 있기 때문에 시장논리를 도입하고 자시고 할 엄밀한 의미에서의 공교육도 존재하지 않는(김기수,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관하여」, 169쪽) 우리 실정에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교육정책은 뭔가 매우 어설픈 느낌이다. 공교육의 영역에 ‘시장 원리’를 도입하는 것을 오직 국민 개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할 목적으로 국가는 뒤로 빠지고 국민(교육 소비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순진무구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결정을 개인에게 위임한다고 해서 정책결정 과정에서 정책입안자들이 행사하는 영향력의 강도가 실제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영향력 행사의 방향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또한 국가의 영향력도 결코 약화된 것이 아니라 기존 사회질서를 바꾸는 데에(예를 들면, 더욱 경쟁지향적인 사회로 바꾸는 쪽으로) 그 영향력이 행사되고 있는 것이다. 중앙집권적인 힘에 근거한 정책이 선택가능한 범위를 결정하고 사회체제, 혹은 그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어떤 선택이 소위 ‘합리적’인가를 미리 결정하는 상황에서의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개인적 자유’라는 것은 순수히 개인적 선택으로 어떤 놀이를 만들어서 해본다든지, 혹은 자율적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나 선호, 목적이 손상 받지않고 반영된 그러한 ‘자유’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란 사회적으로 미리 결정된 ‘게임’에 참가해서 경쟁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데, 이 ‘게임의 법칙’은 기본적으로 그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결정되며, ‘게임의 결과’는 ‘시장의 힘’에 놀아나는 게임 참가자들의 소위 ‘합리적이고 이기적이며 비(非)협동적인 선택’(rational, self-interested, nonco-operative decisions)에 의해서 맹목적으로 생겨날(Ruth, 27쪽) 것이다. 여기서 선택은 개인에 의해서 무작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가 결코 예측 불허한 것이 아니다. 대안교육운동을 포함하여 교육운동 전반의 분위기는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긍정적이거나 적어도 분명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는데, 사실 대안교육운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신자유주의가 ‘통제’보다는‘경쟁’을 지향하기 때문에 ‘대안학교’ 설립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할 것이라는 환상이 생길 수도 있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 실현의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여하튼 교육부가 ‘학교 부적응아’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대안학교’지원에 필요 이상의 적극적 관심과 지원을 제안하면서 교육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거나 약속 받은 ‘대안학교’ ‘특성화학교’ ‘탈규제학교’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고, 이와 함께 몇몇 대안교육 실천 단위와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교육부 사이의 공조체제가 구축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고 교육복지 수준이 높은 서구에서도 신자유주의 정책이 기존의 사회복지(교육복지를 포함하여) 수준을 현저히 후퇴시킨 판에 모든 면에서 열악한 조건에 있는 우리가, 특히 교육영역에서 ‘평등’(equality)이라는 가치를 실현해 본 경험이 없는 우리가 ‘시장원리’를 도입하여 교육복지와 교육의 질을 향상하겠다는 것이 과연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목표일 수 있겠는가! 원론적으로 보더라도, 우리

모두는 ‘사회 속의 개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그 어떤 ‘자발적 선택’도 사실은 ‘사회적 실제’의

영향을 받게 된다. 더욱 강도 높은 ‘경쟁’을 도입할 때 부수적으로 허용되는 ‘제한적 자율’ 때문에 미시적으로는 소위 우리가 원하는 학교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듯 하지만 앞에서 지적한대로 ‘교육 소비자’가 어떤 학교를 선호하게 될 지를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회분석이나 전망은 차치하고라도 시장에서 물건을 고르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보자.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이 바로 상품구입을 결정하는 주체이다. 교육상품의 선택권을 소비자에게 맡기는 것은 아이들의 교육

복지를 증진할 때에만 설득력을 갖게 되는데, 현실적으로는 자녀의 이해를 증진할 수 있는 부모가 갖는 대리권(parental proxy rights)을 통해서 아이들의 이해와 복지보다는 부모의 이해와 복지가 훨씬 더 반영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의 저변에는 아이들의 복지는 궁극적으로는 그들 부모의 현재의 이해와 바람을 잘 보호함으로써 가장 잘 보호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와 지향하는 가치가 근본적으로 방향 전환을 하고, 또 ‘선택권’을 행사하는 학부모들이 그러한 바람직한 새로운 가치를 체화하지 않는 한 어떤 학교가 ‘잘 팔릴지’는 불 보듯 훤하다. 결국 교육시장은 ‘강력한 경제적 처방’을 앞세우는 채권자들과 증권시장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놀아날 것이며, 그래서 교육은 세계화 담론과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을 전사회적으로 확산하는 매우 효율적인 기제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강수돌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3차원의 전도된 병든 사회’이다. 이러한 상황 전개가 예견되는 데도 더구나 교육부가 분명하게 신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교육운동이 신자유주의의 파상적 공세에 대한 대응이라는 전략적 관점을 결여하거나 당장의 이해관계 때문에 의도적으로 간과한다면, 혹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교육정책이 어떤 색깔을 띠든지 내 할 일만 잘하면 된다는 식의 안일한 사고를 한다면, 그것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대안교육운동도 공교육과 함께 ‘세계화 기획’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대안교육(공교육을 포함하여)의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식민화의 첫번째 가능성이다.


탈맥락성과 식민화의 두번째 근거


‘대안교육의 식민화’가 가능한 두번째 근거는 대안교육운동 이론가와 실천가들의 사고와 행동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대안교육에 관심을 보이거나 실제로 실천하고 있는 이론가와 실천가들 중에는 외국의 대안교육 이론과 사례, 특히 방법을 탈맥락적으로 우리 상황에 적용하려고 한다든지, 외국에서 대안교육운동을 전개하였던 방식 그대로를 도입·적용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제도교육의 ‘형식’과 ‘내용’이 ‘식민화’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우리 제도교육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한국의 대안교육운동이 외국의 제도교육 맥락에서 싹 튼 외국의 대안교육 경험의 탈맥락적 적용으로 인한 ‘식민화’(제도교육의 식민화에 이은)의 과정으로 돌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교육 영역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학문 영역이 지나치게 서구 의존적이라는 것은 우리 학계의 고질병이며, 특히 교육 영역은 그 정도가 가장 심한 것으로 지적받아 왔다. 즉 우리 교육은 역사적으로 일본제국주의 교육과 해방후 미국 교육철학과 방법론을 그대로 모방하는데 급급하였다. 이에 반해 대안교육은 이러한 제도교육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탈식민성’이 대안교육운동의 핵심적 성격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대안교육마저도 시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사회와 가치에 대한 전망을 결여하고 그저 외국 대안교육이론이나 실천의 무비판적 도입과 적용의 수준에 머문다면 그것은 제도교육에 이어 대안교육의 ‘식민화’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대안교육운동의 역사가 짧은 우리로서는 외국의 경험이 많은 시사점을 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외국의 경험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이론과 실천을 우리 상황에 적용하는 주체들(즉 대안학교의 교사들)의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힘’이 전제가 된다. 여기서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힘’이란 ‘실천’과는 별개의 지적 작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사고는 올바른 실천을 전제하지 않고는 의 미가 없고 올바른 실천은 다음 단계의 사고의 폭과 질을 결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치’는 우리의 사고와 실천의 방향을 설정한다. 즉, 대안학교의 교사들은 무엇보다도 제도권학교가 놓치고 있거나 전달할 능력이 없는,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반드시 습득해야 할 ‘새로운 가치’의 본질적 성격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체화하여 일상 생활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그 가치가 자연스럽게 묻어 날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삶의 내용과 방식을 교육적 용어로 바꾸어 내서(대안교육교육과정의 개발) 그 속에 담긴 ‘새로운 가치’(대안적인 삶)가 손상되지 않고 가르치는 행위 자체가 곧 가치의 실현 과정이 될 수 있는 방법(대안교육 교육방법의 개발)으로 교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열린 교육이나 대안학교에 관계하는 많은 교사들이 열린 교육의 방법이 무엇인지, 또 대안학교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주로 관심이 있지 열린 교육이 왜 필요하며, 대안학교의 시대적 존재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막연한 신념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후자를 생략하거나 소홀히 할 경우는 결코 올바른 열린 교육 방법도, 또 대안적 교육이념에 걸맞는 대안학교도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안교육의 주체가 소위 대안교육 이론가에게 의존하는 상황이 다시 초래된다. 그리고 이것은 불행히도 지금 한국 대부분의 교육이론(대안교육 영역을 포함하여)은 일본과 서구 학문의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안교육의 식민화’로 이어지게 된다. 교육개혁은 실로 교사의 개혁으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대안적인 삶’을 교육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부터 그러한 삶을 먼저 살아야 한다. 삶의 모습이야 어떻든 ‘교과서’만 잘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으로는 대안교육을 할 수 없다. 대안교육은 기존 사회 질서와는 질적으로 다른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교육개혁운동과 차별성을 가지며 교사부터 낡은 패러다임(서구의 분석적, 과학적 사고에 근거한)을 해체하고 전지구적인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생태주의적이고, 생명중심적이며, 공동체 지향적인 성격의 새로운 대안적 패러다임을 체화하여야 한다. 참으로 교사들(제도권 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은 현실 인식 부족과 미래에 대한 공유된 전망 부재의 극복을 위해 배가의 노력을 경주할 때이다.


대안교육 식민화를 넘어서기 위하여


대안교육과 공교육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공동운명체이다. 공교육이 죽어야 대안교육이 사는 관계도 아니고 공교육이 약할 때 대안교육이 강할 수 있는 그런 관계도 아니다. 공교육과 대안교육은 ‘교육’이라는 같은 몸체에 붙어 있는 서로 다른 기능을 하는 손과 발과 같은 관계인 것이다. 따라서 공교육이 건강할 때 대안교육의 건강한 발전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우리보다 발전된 대안교육을 가지고 있는 나라의 공교육은 우리의 공교육보다 훨씬 민주적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공교육이 또다른 차원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신자유주의의 도입으로 인해 우리의 교육복지, 교육평등, 교육민주화가 현저히 후퇴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대안교육이 발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다. 교육의 공적기능이 ‘시장’에서 손상받게 되면 그것은 대안교육의 설 땅이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의 대안교육운동은 지금이야말로 ‘우리 아이들에게 어떠한 삶을 교육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답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교육주체, 그 중에서도 교사들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전제로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 근본적인 작업을 비껴간 그 어떤 실천도 지금은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기존의 교육과 다른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본다는 정도에서 머무른다면 그것은 교육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을 한다는 위험도 수반하거니

와 시대적 위기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함으로써 그 위기의 힘에 짓눌려버리는 ‘식민화’의 위험이 있다.

우리 교육의 근본적 문제와 사회의 기본 모순을 온존한 채로 교육에 대한 시대적 요구와 무관한 채 얼마든지 교육개혁도 가능하고 기존의 것과는 현상적으로 매우 다른 새로운 교육을 만들어 갈 수도 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대안교육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우리 교육 전반이 안고 있는 기본적인 모순이 변화되지 않은 조건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교육’은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할 때이다. 제도교육과 ‘다른’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하는 교육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필요한’

교육인지를 살펴 볼 때이다. 그리고 그러한 ‘목표’에 도달하는 ‘길’은 우리 스스로가 개척해야 한다. 교육과정이든 교육방법이든, 단순히 프로그램 하나라 하더라도 그것을 소위 서구의 이론에 주로 익숙해 있는 교육전문가의 손에 넘겨주거나 외국 경험의 탈맥락적 적용은 대안교육의 식민화의 또다른 가능성을 현실화 한다. 마지막으로 교육개혁은 교사의 변혁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일부에서는 ‘대안적 가치’, 즉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삶’의 핵심적 성격으로서 생태주의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인 삶이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하다는 지적을 한다. 그러나 비록 ‘선언적’인 수준에 있기는 하지만 지금 단계로서는 이 정도의 방향을 잡은 것으로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잘 정리된 공동체 이념, 생태철학이 아니라 교사가, 부모가 먼저 ‘가르치고 싶은 내용대로 사는 삶’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사와 부모의 낡은 패러다임의 변혁이 요구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생태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인가 하는 것은 사실많이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그러한 ‘대안적 가치’를 가르쳐야 할 사람이 먼저 그러한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삶이 아무리 단순해 보이더라도 우리 아이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줄 것이고, 삶이 뒤따르지 않는 교육은 그러한 교육을 하는 사람에게도 늘 애매하고 막연하고 허망한 것으로 비치게 마련이다.